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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역사 속 연세] 연세 과학의 초석, 장기원 교수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6-11-01

연세 과학의 초석, 장기원 교수

 

 
1903. 6. 16. 평안북도 용천군 출생
1920. 평북 선천 신성중학교 졸업
1921~25. 연희전문학교 이과 졸업
1925. 연희전문학교 이과 조수 임용
1926~29. 일본 동북(東北)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 졸업
1929.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및 연희전문학교 강사 임용
1939. 연희전문학교 교수 임용
1943. 경성대학 부속 중등교원양성소 강사
1946. 연희대학교 이학원장
1952. 대한 수학회 부회장
1961. 10. 연세대학교 총장직무대리 겸 이공대학장
1961. 12. 연세대학교 부총장 겸 이공대학장
1962. 경북대학교 명예이학박사, 대한수학회 회장
1966. 학술원 회원
 
장기원기념관 개관(1972.04.18)
 
장기원기념관
 
오래 전 졸업한 동문들이 모교를 방문해 캠퍼스를 돌아보며 곧잘 묻는 것 중 하나가 ‘장기원 기념관’에 대한 질문이다. 이 기념관은 장기원(張起元, 1903~1966) 선생의 제자와 동료 교수, 동문, 학교가 2년여의 모금활동으로 장만한 우리나라 최초의 교수 기념관으로 각종 학술행사와 세미나가 열려 늘 성황을 이루곤 했다.
 
장기원 박사 흉상(학술정보관)
 
2008년 기념관이 있던 자리에 연세-삼성 학술정보관이 지어지면서 장기원 기념관은 새 건물 7층에 150여석 규모의 장기원 국제회의실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많은 동문들이 연세의 학문과 교육을 대표하던 장기원 기념관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좀처럼 아쉬운 마음을 지우지 못한다.
 
초대 이공대학장 지내며 연세 공학 발전 선도
 
고 장기원 박사 졸업앨범(1926)
 
가을이 한결 깊어지는 11월은 장기원 선생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꼭 50주년이 되는 때다. “가르치고 연구하고 응용한 전형적인 연세인”으로 불려온 장기원 선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북제국대학에서 수학한 수학자다.
1929년 귀국해 이화여전에서 교수로 10년을 보내는 동안 연희전문에서도 수학강사로 해석기하를 강의했다. 1940년부터는 이화여전을 그만두고 연희전문에서 전임강사와 교수를 역임하며 평생을 연세와 함께 했다.
 
해방 후 연희전문학교가 연희대학교로 승격하면서 이학부 또한 이학원으로 개편됐고 장기원 선생은 이학원장이 됐다. 1950년 신교육법에 따라 이공대학으로 개칭되면서 초대 이공대학장을 지낸 선생은 “우리의 과학발전은 선진국의 추종에만 있지 아니하고 우리 문제의 해결에 있다 하여 과학응용에 주력하면서 연세 과학의 한 전통을 세웠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연세의 공학발전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또한 5.16 군사쿠데타의 영향이 대학에도 미치던 1961년 가을부터 1963년 봄까지 연세대학교 총장대리와 부총장을 역임하며 학교의 안정을 위해 기여했다.
 
장기원 선생은 철학과의 정석해, 국문학과의 김윤경 선생과 더불어 연세의 세 석두로 꼽히는데, 원칙을 고집하는 엄격함과 고학생들의 등록금까지 챙기던 인자함까지 겸비한 그의 남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특히 과학관(현 연희관)을 신축할 당시 숙직을 마다하지 않으며 야간 순찰을 돌고 건물바닥이 닳지 않도록 학생과 선생들의 구두굽을 일일이 따질 정도로 꼼꼼했다고 한다.
 
과학관(현 연희관) 준공, 1956
 
그는 다른 교수들의 휴강 시간을 도맡아 수학을 강의하고 길을 걸으면서도 “항상 머릿 속에 수학문제를 생각하면서 행동하라”고 했을 정도로 학업에 엄격했다. 동료 교수들에 대해서도 “대학은 학생만이 자라는 곳이 아니다. 그보다도 교수들이 더 성장해야 하는 곳이다.”라며 연구에 매진해 최고의 실력을 갖추자고 독려했다.
 
스승 밀러 교수의 전통을 잇다 
 
한편, 장기원 선생이 돌아가시기 5개월여 전인 6월 연희전문학교의 창립기부터 수물과를 이끌며 한국 근대과학의 출발을 도운 밀러(E.H. Miller, 밀의두密義斗, 1873~1966) 교수가 미국에서 서거했다. 밀러 교수는 일제 말 추방당하기 전까지 연희전문의 치원관, 본관, 학관, 상경관 등을 설계하고 노천극장 등 교지의 측량사업을 맡아 추진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과학 지식 보급에 힘써 이론화학, 전기화학, 무기화학, 유기과학, 지질학 등을 가르쳤다.
 
수물과에서 밀러 교수로부터 교육을 받았던 장기원 선생은 『연세춘추』에 추도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평생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과학의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고 공학의 발전에 앞장섰던 장기원 선생의 신념을 스승 밀러 교수에 대한 추도문의 글귀에서 가늠해볼 수 있다.
 
고 장기원 박사 학교장
 
장기원 선생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뒤 1966년 11월 9일 노천극장에서 5천여 명의 조문객과 함께 학교장이 치러졌다. 당시 박대선 전 총장은 “가르침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학교 특히 이공대학 발전에 진력하셔서 연세 학원을 지키며 사셨다.”고 추도했으며, 교목 지동식 선생은 “고인께서 말보다는 직접 행동함으로써 제자들을 이끌어 나가셨다.”고 설교했다.
 
“연세에서 자라고, 연세에서 일하고, 연세 과학의 전통을 길러내고, 연세를 빛낸” 장기원 선생의 서거 50주기를 지내며 생전 “진실하고 근면하라”던 그의 당부 말씀을 다시금 새겨두고 싶다.  (자료 및 사진 제공: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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