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좋은 집은 내 삶을 담아내는 터전
컨설팅랩 이엘 최령 대표(주생활학 83)
살기 좋은 집을 상상할 때 처음 떠올리는 것은 잘 갖춰진 편의시설, 감각적인 인테리어, 아파트의 조경 등 공간 자체의 안락함, 보기 좋은 모습에 한정되는 것이 일쑤다. 또 우리나라에서 집은 대개 부동산 투자와 함께 인식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노후에 덩그러니 남는 자산이기도 하다. 하지만 ‘집’이라는 공간은 다층적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삶, 생활의 맥락 안에서 집은 존재 이유를 가지고, 물리적 공간을 넘어 사회, 커뮤니티와 연계해 통합적으로 읽혀야 한다. 최령 동문은 ‘삶의 터’로 집의 본질적인 가치에 주목해 우리나라에 주거환경의 개념이 뿌리내리지 않았던 80년대부터 이를 탐구하고 전파하며 변화를 이끌어 왔다. 그가 말하는 살기 좋은 집은 무엇일까?
깊이 빠져들수록 재미있는 배움과 탐구
최령 동문이 입학할 때만 해도 주생활학(현 실내건축학)은 국내에서 낯선 학문이었다. 단순하게 집을 디자인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주생활학은 생활환경과 사람의 관계를 탐구하고, 계획, 설계, 디자인, 운영까지 통합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다양한 시도, 선진 사례의 도입 등을 통해 우리나라 주거 환경 분야를 개척해온 최령 동문 역시 당시에는 어떤 정보도 없어 막연하기만 했다.
“누구나 그렇듯, 내가 사는 집에 관심이 있잖아요. 게다가 오빠가 연세 출신이라 어린 시절부터 우리 대학교에 오고 싶었어요. 사실 집에 관한 관심은 있었지만 당시 낯설었던 주거생활학이라는 학문이 처음에는 집을 예쁘게 만드는 것인가 싶기도 했어요. 입학해서 공부를 해보니, 결국 주거라는 게 삶의 터전이잖아요. 삶의 터전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이었어요. 삶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공간을 바라보는 것이죠.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재미있었어요.”
공부에 대한 재미를 더해가면서 2학년 2학기 즈음에는 진로에 대한 고민도 시작했다. 1학년부터 연세교육방송국(YBS)에서 PD로 활동하면서 만끽한 즐거움도 컸기에 방송 분야와 전공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꽤 깊은 고민 끝에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분야를 찾았고 무엇보다 주거학 공부에 대한 갈증이 컸기에 전공을 택했다. 이는 일본 유학으로 이어졌다.
“주거학에는 디자인이나 건축의 개념도 융합되어 있기 때문에 다양한 영역이 있어요. 세세한 것들에 대한 실무 능력도 필요하고 그쪽으로 커리어를 잡아가는 경우도 많아요. 하지만 저는 실무보다는 무언가를 보고 분석하고 아이디어를 만들어 기획하는 것이 매우 잘 맞았어요. 삶과 연계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이 재미도 컸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전공 쪽으로 진로를 잡아야겠다 싶었어요.”
졸업을 하고 1년 정도 오피스 가구 회사에서 가구와 공간 구성을 효율적으로 구성하는 일을 하기도 했지만, 꿈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 당시는 졸업 후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세대라 고민이 더 많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하고싶은 일을 선택했다.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가 가장 큰 즐거움인 학문으로 실현됐다.
“많은 고민 끝에 주거학 분야에서 이름난 일본 나라여자대학교로 유학을 갔어요. 특히 노인과 아동에 특화된 랩에서 연구를 시작했죠. 당시 우리나라는 노인과 아동에 대한 주목도가 높지 않았던 상황이었지만 일본은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가시화된 사례들도 많았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노인 주거・환경에 대한 분야를 파고들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실버타운과 비교할 수 있는 ‘노인홈’에 대해 연구했어요. 깊이를 더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들도 많았죠. 실제 노인홈에 머무르며 생활상을 관찰하고 논문을 쓰기도 했어요. 좀 더 실제적으로 이 문제가 다가왔어요.”
국내 주거학과 유니버설 디자인의 개척자
그렇게 배우고 연구하는 재미에 빠져 지냈던 그는 그 사이 YBS에서 인연을 맺어 10년을 만난 동문과 결혼을 하기도 했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우리 대학교에서 강의와 연구활동을 했고 외부 강의도 병행하며 유학시절 보고 경험한 것들을 풀어냈다. 특히 아직 주거학에 대한 선진 개념 도입이나 적용이 학문적, 사회적으로 안착되지 않은 국내에서 그는 선도자로서 역할을 했다.
“귀국 후 연세에서 교수님, 선후배들과 함께 유니버설 디자인으로도 연구를 확장했어요.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한국에 막 도입되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연구한 첫 주자가 연세이기도 했죠. 아직도 자부심이 커요. 유니버설 디자인은 유학시절 이미 일본에서 주거뿐 아니라 다양한 산업에 적용되고 있어서 저 역시 그런 흐름과 사례들을 접할 수 있었어요. 노인의 주거환경에 유니버설 디자인 개념을 적용해 업그레이드 시키는 사례들도 많았어요. 그런 변화를 우리나라에서도 시도하게 됐죠.”
국내에 노인, 아동의 주거환경을 비롯해 유니버설 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그는 수많은 강연과 연구를 이어갔다. 생활환경연구소를 설립해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프로젝트들도 진행했다. 관련해서 그가 이룬 최초의 사례들은 현재까지 많은 연구자들과 정책 실무자들의 연구와 실행에 단단한 토대가 되고 있다.
“경기도와 함께 유니버설 디자인이 환경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가이드를 만들었어요. 이를 실행할 관련자들의 교육에도 참여했죠. 서울시와 노인시설, 어린이집 등의 복지시설 가이드를 만들기도 했고요. 저출산 고령화에 대한 이슈가 커지면서 아이들 환경 디자인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고요. 아이를 키우면서 주거환경에 대한 여러 문제들을 직접 체감하고, 아동 친화적인 디자인의 집과 마을 구성으로 일정 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봤죠.”
2020년 최령 동문은 서울시 유니버설디자인센터의 초대 센터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저출산에 대응하기 위해 도시 안 공간들, 화장실, 아기 휴게실 등 세심한 시설들을 구상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편리하면서도 기분 좋은 공간으로 삶의 가치가 함께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 결과가 현재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 녹아 있다.
그는 주거환경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현재는 주거환경 컨설팅 회사인 ‘컨설팅랩 이엘’을 운영하며 다양한 영역에서 기획, 자문, 강연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영향력을 가져야 세상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 사실 누군가의 마음만 있으면 공간을 확보하고 가치 있게 디자인 할 수 있어요. 단지 하나의 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통찰력 있는 디자인이 더해져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많은 것이 달라져요. 어쩌면 당연한 얘기이지만, 현실에서는 자꾸 당연하지 않게 만들고 있어서 당연함으로 바꿔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회적 약자, 현실의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가치지향적인 탐구
최령 동문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 과정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삶의 변화는 자연스레 자신의 보람과 자부심으로 이어졌다.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노인 주거환경에 대한 고민과 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도 커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은퇴 후 편안한 노후를 보내기 좋은 곳으로 실버타운을 꼽는다. 그러나 실버타운과 같은 유료 노인룸은 거주 비용이 높아 부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최령 동문은 처음 노인 주거환경에 대한 논문을 쓰고 나서 이런 현실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부자들을 위한 공간 연구를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써야 하는지 고민스러웠다고. 그는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노인홈을 만든 교수와 교류하며 공간의 변화가 만든 선한 영향력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됐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노인홈 사례를 보면서 좋은 공간, 잘 디자인된 주거환경이 어르신들의 노후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어요. 노인 시설에 대한 사회의 기피 현상을 극복할 수도 있죠. 예를 들어 예쁜 식당을 만들면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사람도 식사하러 올 수 있겠죠.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지역 안에 노인의 삶의 터전이 녹아들어 있는 거죠. 또, 치매 노인의 경우 8명에서 12명 정도의 어르신을 하나의 유닛으로 만들어 소규모 케어하는 경우도 있고요. 이런 공간이 확산되면 국가나 개인 모두 좋은 일이잖아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렇게 가치가 있구나 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어요. 현실에서 쓸데없는 연구를 하면 너무 재미가 없잖아요. (웃음)”
이런 가치 지향적인 연구를 통해 그는 실제 좋은 공간을 만들며 의미를 찾아왔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농촌 주거환경 변화 프로젝트다. 노인, 아동의 주거환경에 대한 활동을 하다 보니 농림축산식품부에서 고령화된 농촌의 거주 환경 개선에 대한 자문을 요청해왔다. 다양한 농촌 환경을 살펴보는 기회를 가지게 됐고 농촌 주거 환경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변화를 이끄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 ‘좋은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최 동문의 열정이 자연스레 소외받던 농촌 주거 환경을 개선, 변화시키는 일로 이어졌다.
“사실 농촌이 도시의 미래잖아요. 농촌의 자본, 인적 자원들이 도시로 흡수돼 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도시는 팽창하고 농촌은 소외되고 버려졌어요. 어떻게 농촌 환경을 더 살고 싶고, 편하고, 소외되지 않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컨설팅하면서 그 변화를 직접 주도하고 싶었어요. 사실 집보다는 마을의 커뮤니티 시설을 만들어 아이들을 위한 돌봄 공간, 주민들을 잇는 문화 공간 등을 만들었어요. 글쎄 한 아이가 코코아 음료를 사먹기 위해 멀리 한 시간 거리의 도시까지 나간다는 거예요. 도시처럼 잘 갖춰지지 않았더라도 소박한 카페 하나만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지역민들끼리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지역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것이 핵심이었어요. 이렇게 ‘농촌 중심지 활성화 사업’을 8년 여에 걸쳐 진행했고, 긴 시간 동안 주민들의 삶이 변화되는 것을 직접 보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서 기대 이상의 보람을 느꼈어요. 프로젝트 완료 후 한 주민이 ‘여기, 도시 근교의 근사한 주거지 같지 않아요?’라며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사실 이것이 그 공간을 새롭게 만들고자 했던 이유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10개 정도의 농촌 주거환경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한 최령 동문은 계량화된 성과보다 주민들이 ‘체감하는 가치’에 줄곧 집중했다. 가치지향적인 일을 한다는 것이 최 동문에게도 가장 의미 있는 성과였다.
노년에 살기 좋은 집은 공동체의 자원이 연계된 곳
국내 주거환경학 연구와 유니버설 디자인 분야에서 새 길을 내 온 최령 동문은, 앞으로 또 다른 새 길을 낼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분야를 완결하며 마무리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유니버설 디자인 분야에서는 이를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법제화하여 후배들이 다양한 연구와 적용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한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앞에 섰던 사람들이 그 환경을 만들어 줘야겠죠. 계속해서 정부 기관이나 국회 등에 협력을 구하고 있고요. 법제화를 통해 국가가 어느 정도는 정책으로 리드하고, 이를 통해 생태계가 구축되면 민간 기업들이 움직일 수 있겠죠. 다른 한 편에서는 초고령사회에서 노인 주거 개념과 방향성을 제시하고 다음 화두를 던지고 싶어요. 현재 아파트는 사람들의 삶의 터라는 인식보다 재화, 부동산으로 여기는 시선이 많잖아요.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삶의 터’라는 인식을 높이고 노년의 삶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제시하고 싶어요.”
궁극적으로 그가 지향하는 노인 주거는 집이 확장된 ‘커뮤니티의 개념이다. 실버타운을 더 많이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왔던 집, 공동체 안에서 노년의 삶을 행복하게 보내고 마지막 생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어디에서 살 것인가’라는 고민에 대한 그의 답이다.
“지역사회 자원들을 잘 연계한 주거만 잘 만들어도 충분히 안전하고 편안하게 환경을 누리면서 살 수 있어요. 굳이 낯선 곳에 외딴 섬처럼 노인들을 독립시킬 것이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죠. 내가 살던 곳, 내가 다니던 가게, 내가 만나던 사람들과 함께하는 익숙한 커뮤니티 안에서 살면서 지역사회와 연동되어 살아가는 것이 좋아요. 이를 위해 국가적인 케어, 돌봄서비스나 민간 회사들의 노후 서비스 등 각 자원을 연계해 생태계를 완성하는 일이 우선돼야 해요. 사실 각각의 자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거든요. 어떻게 보면 지역민들 간의 연계를 통해 지역 사회의 어린이 돌봄에 동참할 수도 있어요. 지역 의료 선생님들과도 연계하는 등 연결할 수 있는 지역 사회의 자원은 많아요. 또 무엇보다 모두에게 잘 늙어갈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당연하다는 점을 인지시키고, 집을 짓는 첫 단계부터 그 고민들을 담아냈으면 해요.”
아이를 키우기 좋은 집, 노후를 보내기 좋은 집, 문화, 의료 등의 시설과 서비스가 잘 갖춰진 지역 사회를 만들고 그 안에서 통합되고 시너지를 낸다면 삶의 질을 높이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최령 동문. 결국 이런 방향은 세대를 넘어 주거의 선순환을 만들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초고령화, 저출산 문제에도 대응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지금이 빠르게 고령화와 저출산에 대응해야 하는 시점이에요. 커뮤니티 기반 주거환경 변화가 기여를 할 것이라고 봐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해시키고 전파해 궁극적으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일이라면, 강연이든 무엇이든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좋은 사례와 지식을 공유하면서 어떻게 변화를 만들고, 우리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 발전시켜야 할지 후배들에게 숙제로 남겨두고자 합니다.”
최령 동문은 비싸고 화려한 집이 좋은 집이 아니라, 마음이 담기고 의도가 충분히 담겨있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연구에 진심을 담아 사회적 가치 확산과 실현에까지 닿고자 애써온 최 동문이 내린 정의라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그의 바람처럼 집을 ‘삶의 터’로서 인식하는 문화가 자리잡고, 노인과 약자를 포함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익숙한 커뮤니티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주거환경이 만들어지기를, 우리 사회가 물질적 번영을 넘어 보다 성숙한 사회로 성장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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