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맥락을 제대로 읽는 힘
글쓰기를 통해 세상을 읽는 길정현 작가(컴퓨터과학/응용통계학 05)
우리나라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의 문해력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성토가 들려온다. 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4명 중 3명에 이를 정도라는, 조금은 극단적인 기사도 보게 된다. 곳곳에서 문해력을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지만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문해력은 단순히 글의 맥락을 파악하는 데 국한되지 않고 텍스트 기반의 모든 커뮤니케이션 과정, 인간관계라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다수의 책을 쓴 길정현 동문은 이러한 관점에서 문해력의 힘을 말하며, 문해력을 재미있게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0과 1사이, 세상을 표현하는 숫자들에 매료돼
길정현 동문은 작가이지만 직장인이기도 하다. 항공사에서 데이터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그는 여행 책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8권의 책을 썼다. 업무와 관련된 책들인가 싶지만 그가 내놓은 책들은 여행, 예술, 미식, 자기 계발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대학에서는 컴퓨터과학과 응용통계학을 전공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고 글 쓰는 것이 즐거웠지만 막상 작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컴퓨터과학은 0과 1로 이뤄진 이진법의 체계로 세상의 현상을 설명하는 학문이잖아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실 0과 1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것이고요. 아날로그 세상을 0과 1로 디지털화해서 표현하는 학문을 배우면서 ‘우리 삶은 0과 1처럼 딱 떨어지는 것이 거의 없는데 왜 이 공부를 하느라 고생을 하고 있지?’ 라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웃음)
언제나 세상에 대해 다양한 흥미와 면밀한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이진법에 갇혀 있는 공부가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그런데 응용통계학을 공부하며 또 다른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통계라는 것은 0과 1 사이의 숫자들로 세상의 현상을 표현하는 것이에요. 그런 점이 너무 재미있어 응용통계학을 이중 전공하게 됐어요. 사실 작가라는 업과도 좀 관련이 있나 싶기도 한 지점이 결국 컴퓨터과학은 0과 1로 세상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고, 통계학 역시도 어떤 가설을 세우고 확률을 근거 삼아 논리를 풀어가는 것이죠. 그래서 컴퓨터과학, 응용통계학 모두 어떤 이야기를 풀어내는 학문인 셈이고 그것이 현재 제가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봐요.”
응용통계학에 재미를 붙인 그는 졸업 후 항공사에 입사했고, 현재까지 데이터 관련 업무를 맡으며 직장인의 삶과 작가의 삶을 병행하고 있다.
손에 잡히는 글을 쓰는 즐거움
길정현 동문이 직장인에 그치지 않고 작가로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다방면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창조적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에는 학과 공부 외에도 음악, 미술 등 좋아하는 일을 해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학과 내 소모임 중 ‘소음’이라는 밴드 활동도 했다. 정해진 밴드 구성대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다른 구성 혹은 컬래버레이션으로 공연해 보는 실험적인 밴드였다. 그곳에서 그는 베이스 기타를 담당했다. 미술 쪽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고, 많은 전시회를 다니기도 했다. 어찌 보면 미술이나 음악 역시 작가만의 관점으로 세상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으로 작가로서 그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 그렇게 길정현 동문은 세상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이야기로 풀어내는 창조적인 작업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글 쓰는 일을 또 다른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손에 잡히는 창작물, 즉 ‘물성을 가진 나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사소하다면 무척 사소한 것인데 사실 데이터는 내 컴퓨터 안에만 있고 컴퓨터를 끄면 실제가 없는 것 같은 휘발성의 느낌이 있잖아요. 카페에서 커피를 만들면 커피라는 실물이 있지만 데이터는 그렇지 않죠. 그래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진짜 실체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런데 책은 물성이 있잖아요. 내 글을 내 손에 잡히는 물리적인 실체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동시에 데이터를 다루면서 느끼게 되는 한계,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기도 했고요.”
이렇게 좋은 것들, 나만 알긴 아까워
길정현 동문의 첫 책은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을 통해 발간된 여행책이다. 여행을 좋아하기도 했고, 여행업에 종사한다는 점, 또 당시 여행책이 트렌드이기도 했기에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래서 데뷔 초반에는 여행 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다 팬데믹을 거치고 개인적인 출산 시기를 지나며 여행 이야기를 넘어 다양한 주제로 영역을 확장했다. 출간된 책들은 현재까지 총 8권. 이제 그는 여행 작가가 아닌 그냥 작가로 불리는 것에 더 익숙하다. 무엇보다 길 동문의 책들은 그가 일상에서 좋아하는 여행, 미술, 음악, 동물, 미식 등 다양한 이야기로 채워져 왔기에 하나하나 다 의미가 있다.
“저는 좋아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제가 쓰는 글들 역시 그것들로 채워지죠. ‘아니, 이렇게 좋은데 왜 남들은 이 좋은 걸 모르지, 빨리 내가 알려주고 싶다’는 마음에 글을 써온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단순히 ‘난 이런 걸 좋아하니 당신도 좋다는 것을 알아줘’라는 수준을 넘어 타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책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왜 제대로 못 읽을까>는 이런 관점에서 쓰게 된 자기 계발서예요.”
그의 책은 다채로운 주제뿐만 아니라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예술가와 네 발 달린 친구들>에서는 예술가들의 삶의 동반자이자 뮤즈가 되어 준 반려동물을 통해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엿본다. <1일 1면식>에서는 소설, 영화, 그림 속에 등장하는 국수 요리에 담긴 이야기들을 따뜻하고 유쾌하게 담았다. <고양이와 함께 티테이블 위 세계 정복>은 스물아홉 개의 디저트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단편 소설을 읽으며 문해력도 키우는 재미
<나는 왜 제대로 못 읽을까>는 길정현 동문에게 일종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그의 말대로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의미심장한 책이다. 그간 발간해 온 인문서나 에세이 장르를 타인의 성장으로 관심이 확장된 자기 계발서다. 이 책은 디지털 시대에 많은 문제가 되고 있는 ‘문해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담은 책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자기 계발서 형식이 아닌, 그만의 쉽고 재미있는 관점으로 주제를 다룬다. 특히 이 책이 반가운 것은 사회생활의 관점에서 문해력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길정현 동문은 문해력이 복잡한 문제해결 능력이 필요한 사회생활과 직결되기 때문에 문해력을 높이면 문제해결능력을 높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문해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으로 단편 소설 읽기를 추천한다. 그의 책에는 케이트 쇼팽, 버지니아 울프, 김승옥, 김애란 작가 등 장르를 불문한 서른 여 편의 단편 소설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자주 가는 단골 서점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요즘 사람들이 단편 소설을 잘 못 읽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열 권이 넘는 장편 소설도 아니고 열 페이지에서 스무 페이지 남짓의 단편 소설을 왜 못 읽지?’ 싶었는데 단편 소설은 짧은 만큼 암시되는 것, 함축적인 표현이 많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는 것이었어요. ‘함축적인 부분이 많은 글이 왜 어려울까', 자연스레 생각이 이어졌고 결국 문해력 부족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됐죠. 그렇게 단편소설과 문해력을 연결한 책을 낸 것이고요. 또 재미가 있어야 읽는 행위로 연결이 되는 만큼, 단편소설이라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짬짬이 머리맡에 두고 읽는 것으로도 충분히 문해력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문해력은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사회적 눈치
사회적으로 문해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면서 학생들을 위한 문해력 향상 서적이 많이 출판됐으나, 아직까지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서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길정현 동문은 문해력이 사회생활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누군가가 쓴 문서를 봐야 하고 나도 써야 하죠. 모든 일이 다 말과 글로 돌아가요. 어쩔 수 없이 문해력이 필요한데, 문해력이 낮으면 공지사항을 여러 번 읽고 질문을 많이 해야 정보를 파악하는 경우가 많아요. 결국 문해력은 맥락을 읽는 힘이고, 사회생활로 보자면 왜 눈치를 챙기라는 말이 있잖아요. 사회적 맥락에 맞게 행동하라는 거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때론 말 한마디로 틀어지기도 하잖아요.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엉뚱한 말을 해서 분위기를 다운시키기도 하고요. 특히나 한국은 고맥락 사회라고 하는데, 영어처럼 직설적인 언어와 달리, 숨겨진 함축적인 표현이 많다는 거죠. 고맥락 사회일수록 저 사람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파악하는 능력이 많이 필요한데 요즘은 그런 부분에서도 안타까운 점들이 많아요.”
여러 강연이나 북토크 등에서 문해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길정현 동문. 특히 어린 학생들의 문해력 문제가 크다 보니 학부모들에게 책 읽기에 대한 질문도 많이 받는다. 그럴 때마다 그는 좀 안타까운 순간들을 마주하곤 한다.
“예전엔 아이가 글을 모르면 양육자가 읽어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책에 펜을 대면 펜이 텍스트를 인식해서 읽어주는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는 경우가 많아요. 엄마나 아빠가 옆에서 읽어주지 않아도 펜만 쥐여주면 되죠. 단순히 펜이 읽어주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 책을 보다 ‘범인’이라는 단어가 있다고 하면 아이들이 펜으로 들은 범인이 무슨 뜻인지 묻죠. 그래서 나쁜 사람, 도둑이야 정도로 설명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문맥 안에서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던 거예요. 이렇게 문맥을 파악해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아직까지 기계가 다 채워주기는 어렵다고 봐요.”
N잡러로서의 일상, 회복의 시간으로 재충전
길정현 동문은 작가, 직장인, 워킹맘이기도 하고 북인플루언서이자 독서모임 운영자,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누구보다 부지런하다는 그 스스로도 ‘힘든 일이긴 하다’고 할 정도로 일상이 분주하다. 그럼에도 N잡러로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다양한 페르소나들 사이, 균형 잡기의 비결이라도 있는 것일까.
“주변에서 제가 굉장히 부지런하다고들 하더라고요. 하루를 48시간처럼 산다고요. 그렇다고 제가 유달리 잠을 적게 자는 것은 아닌데, 그냥 자투리 시간을 잘 쓰는 것 같긴 해요. 책도 짬짬이 읽고 글도 짬짬이 쓰고요. 또 저는 천성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해요. 이상하죠. 바깥에 많이 나가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거든요. MBTI에서 완전히 I형인데 그냥 집안에서 계속 뭔가를 하고 있어요. 책을 보거나 글을 쓰거나 하면서요. 그게 또 스스로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물론 때로는 지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여행길에 오르거나 친구들과 자리를 만들어 신나게 놀기도 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응원하고 다독여 줄 수 있는 온전한 자신의 시공간에서 그는 회복하고 충전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글쓰기로 만들어가는 더 나은 세상
길정현 동문의 삶의 지향점은 언제나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신간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궁극적인 자기 계발이라는 것이다. 이런 메시지에 공감하는 독자들을 만날 때마다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만끽한다.
“제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통해 세상을 좀 더 좋게 변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첫 도전이었지만 자기 계발서를 통해 누군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사람들이 늘어나면 자연스레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길정현 동문은 얼마 전 9번째 책을 계약해, 내년 봄 출간할 예정이다. ‘나비처럼 예쁜’이라는 뜻을 가진 그의 필명 ‘나예’처럼 또 한 권의 책이 그의 세상에서 펼쳐 나와 세상을 더 예쁘고 다채롭게 변화시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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