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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세계 외교 무대에서 미래의 역사를 만들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4-06-26

세계 외교 무대에서 미래의 역사를 만들다

외교 무대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온 박은하 전 주영국 대사(사학 80)

 


박은하 동문의 집에는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외교관으로서 전 세계를 무대로 일하며 모은 소품, 예술작품들이 가득하다. 여성 최초 외무고시 수석, 여성 직업 외교관 최초 영국 대사 부임을 비롯해 그가 이룬 최초, 최고의 성취에 담긴 이야깃거리도 즐비하지만 인도, 중국, 대만, 영국 등 그가 부임했던 곳곳에서 경험한 삶과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품들이 품고 있는 소소한 이야기들도 풍성하다. 누구보다 열정을 다해 치열한 외교 무대를 누비며 사명감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던 시간들. 그는 자신만의 길을 찾았고, 실시간 변화하는 역사의 현장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를 ‘여성 최초’라는 프레임에 가두지 못할 이야기들이 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현장의 중심에 서는 꿈 

“어린 시절, 꿈이 여러 번 바뀌긴 했어요. 처음엔 화가가 되고 싶었죠. 하지만 테크닉적인 측면은 내가 할 수 있겠지만 천재성은 좀 부족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러다 역사가가 되고 싶었죠. 역사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역사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어요. 그래서 우리 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고요. 공부가 재미있기도 했지만, 우리나라는 나라를 빼앗긴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잖아요. 과거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보다 새로운, 미래의 역사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현장에 있고 싶었죠.”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자신을 들여다보고 삶의 방향을 정한 박은하 동문은 우리나라와 사뭇 다른, 세계를 지배하고 이끈 서구 세계, 유럽이 궁금해졌다. 박 동문이 대학생이던 시절은 지금과 달리 해외에 쉽게 나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유럽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하고 싶다’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해봐야겠다’로 의지가 더해졌고, 결국 방법을 찾아냈다. 그의 목적지는 독일이었다.


“당시에는 여행 자유화도 안 됐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마침 우리 학과에 독일에서 오신 교수님이 계셔서, 독일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물었죠. 여름학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교수님의 추천서를 받아 본대학교(University of Bonn)의 계절학기 입학 허가도 받았죠. 그러고 나서 바로 총장실을 찾아갔어요. (웃음) 독일에 가서 여름방학 동안 공부를 하고 싶으니 총장님의 특별 허가가 필요하다고 설득했고, 여권을 받을 수 있었죠.”


그러나 독일에서도 책상에만 앉아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그가 원하는 삶의 목적과는 좀 달랐다. 어렵사리 기회를 얻어낸 여름학기를 과감하게 그만뒀다. 그리고 그가 한 일은 바로 유레일패스를 끊은 것. 한 달 반 정도, 유럽 전 지역을 누볐다. 그는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방향으로 실행하며 삶을 움직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비로소 실감했죠. 나는 정말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것을요. 국제 무대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일을 하고 싶다. 사실 당시엔 막연하기도 했어요. 외교관이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 외교관이 되려면 외무고시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죠. 하지만 졸업 즈음까지도 확실히 마음을 정하지는 못했어요. 서양사를 더 배워볼까 싶어 대학원에 지원했는데 절 뽑아주지 않더라고요. 외교관이 되겠다고 빨리 결심할 수 있었던 게 어쩌면 학교 덕분인지도 모르겠네요.”

 

 



외무고시 합격, 남성 중심 문화에서 살아남기 

대학원 진학의 기회를 얻지 못한 박은하 동문은 졸업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외무고시를 준비했다. 그리고 1985년 외무고시 19회에 1년여 만에 합격했다. ‘고시’라 불릴 정도로 어려운 시험, 남들은 몇 년을 준비하는 시험에서 무려 그는 ‘여성 최초로 수석 합격’이라는 타이틀도 획득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의아한 시선들과 마주쳐야 했다. 당시 외무고시를 준비하는 여학생은 거의 없을 정도로 남성 중심의 분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여성의 사회 진출이 많지 않았던 시대이기도 했고, 외교관은 오랫동안 해외에서 여러 국가를 옮겨 가며 살아야 하는 직업이기에 여성이 가능한가?라는 의구심이 팽배했다.


“어학당에 회화 수업을 받으러 가서 외무고시 회화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면 모두들 놀랍다는 눈빛으로 쳐다봤죠. 심지어 여자가 외국에서 어떻게 혼자 살 수 있냐, 결혼하면 남편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도 받았어요. 외무부 면접에서는 결혼할 것인지, 결혼하고 나서도 외교관 생활을 계속할 것인지를 묻더라고요. 시절이 참 달랐어요. 결혼을 하면 대부분 여성은 직장을 그만두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요.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한편으로는 결혼과 상관없이 전문성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것은 이 일이다 싶기도 했고요. 당시 면접관의 질문에 저는 ‘내 결혼과 직장 생활은 상관이 없다, 결혼을 해도 이 일은 계속할 것’이라고 단언했죠. (웃음) 실제로도 그랬고요.”


실제로 입사한 후 느꼈던 유리천장은 놀라울 정도로 견고했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피부로 느끼지 못했던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여자가 가질 수 있는 기회는 무척 한정적이었다.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실력을 쌓아갔지만, 그럴 때 돌아오는 얘기는 ‘웬만한 남자보다 낫다’는 말이었다. 이는 박은하 동문이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기도 했다. 


“선배들이 칭찬의 의미로 하는 말이었지만 저는 너무 듣기 싫었어요. ‘정말 잘하는 남자보다 낫다’는 말이 칭찬 아닌가요? 여성이라 한계를 두는, 그런 일들이 당시엔 많았죠. 입사 후 2년 정도 지나 해외 연수를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그 직전에 외교부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그랬더니 결혼할 사람이 왜 연수를 가느냐, 연수 기회를 반납하라는 말도 들었죠. 물론 제가 그것에 굴할 사람은 아니죠. (웃음) 또 여성이기 때문에 미국, 일본 등 외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주요 국가에 갈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어요. 어느 정도 품위를 지켜야 하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투영된 국가들만 갈 수 있었죠. 중요한 국가도 안 되고, 위험 국가도 안 되고 한마디로 하드코어(hard core)는 안 된다는 분위기였어요.” 

 


큰 일의 부품이 되기보다는 작은 일을 주도적으로 

그렇지만 박은하 동문에게 그 시절 여성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통념과 기대는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자부심, 그리고 내 역량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남성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자신의 성장과 꿈을 위해서. 남들의 길을 좇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잃지 않으며,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보이지 않는 장벽들이 있었지만 남들에게 제 행복을 맡기고 싶지 않았어요. 남들이 선망하는 자리라서 가고 싶다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기 때문에 여기저기 부딪히더라도 가려고 했죠. 비록 하드코어라도 기회가 왔다면 도전했어요. 결국 제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남들에게 멋지게 보일지 몰라도 커다란 기계에 딸린 하나의 부품이 되기보다는 작은 일이라도 내 방식대로 어젠다를 설정하고, 의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어요. 예컨대 북핵 문제와 같은 장차관급 이슈는 내가 주도권을 가지기 힘들잖아요. 하지만 유엔에서 여성 인권에 대한 이슈를 제기하고 여성지위위원회에 참여하는 일은 제가 주도권을 가질 수 있죠. 그런 일들이 재미있었어요.” 


정부, 경제, 공공 외교까지, 그만의 방법을 찾아내며 외교 무대에 얼굴을 알리고 앞서 나갔다. 뉴욕 영사, 외교부 기획조사 과장, 유엔대표부 공사참사관, 개발협력국장, 주 중국 공사, 공공외교대사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다자 외교 전문가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중국 전문가, 혹은 공공외교 전문가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는 한마디로 자신의 경력, 전문 분야를 규정짓지 않는다. 그저 재미있는 일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외교관의 역할에 대한 그만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유엔에 근무하면서 다자 외교를 경험했고 영국, 인도, 중국 등의 국가에서 근무했는데 이건 또 양자 외교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외교관은 기본적으로 제너럴리스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나라에서 어떤 역할이 주어지든지 자기의 몫을 해내야 하죠. 주요 이슈에 대해 토론을 하고 우리나라의 입장을 전하고 설득할 수 있을 만큼의 지식도 있어야 하고요. 제가 통상전문가는 아니지만 한영 FTA 협상 과정에서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요. 그런 다음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아주 깊게 알아야 하죠.” 


경험한 모든 나라에서의 외교 현장을 적극 즐겼다는 박은하 동문은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의 면모를 모두 갖춘 외교관으로 많은 성과를 이뤘다. 박은하 동문은 외교관으로서의 오랜 경험 속에서 느꼈던 훌륭한 외교관의 자질로 4가지 ‘P’를 꼽는다. 그것은 열정(Passion), 노력(Practice), 인내심(Patience), 애국심(Patriotism)이다. 우리나라 대표로 일하고 싶다는 자기 열정, 역량을 높이기 위한 자기 연마, 타인에게 나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도록 투여하는 시간과 열정, 그리고 공적인 일에 대한 사명을 가지는 애국심이다. 이는 외교관을 꿈꾸는 많은 이들이 꼭 염두에 뒀으면 하는 덕목들이자, 외교관의 삶을 살아오며 그가 지켜온 수많은 선택들의 바탕이기도 하다. 

 




여성 외교관 최초 영국 대사, 사명감으로 이룬 성취 

박은하 동문의 외교관 생활 중 가장 빛났던 순간은 언제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영국 대사로 부임한 시절을 꼽을 것이다. ‘최초’라는 수많은 타이틀을 성취한 그였지만 영국 대사 부임은 한 단계 더 도약한 의미였다. 외교부 출범 70년 이후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에 임명된 최초의 여성 직업 외교관이었다. 영국은 그만큼 국제적 영향력이 있을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 중심에 있는 나라다. 외교전도 치열한 나라, 영국 대사직은 여성에게는 쉽사리 주어지지 않는 기회였다. 


브렉시트(Brexit) 시기, 우리 기업들의 경제적 타격을 줄이기 위해 한영 FTA 체결 협상에 기여한 성과도 있지만, 그가 특히 보람을 느끼는 일 중 하나는 우리 국민이 영국에 입국할 때 별도의 입국심사 없이 자동입국할 수 있도록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입국 절차가 까다롭고 오래 걸리기로 이름난 영국 히드로(heathrow)와 개트윅(gatwick) 공항에서 우리 국민들은 대면 인터뷰와 입국서류 작성 없이 여권 스캔과 안면 인식만으로 입국심사를 거칠 수 있도록 협상한 것이다. 당시 이 자동입국제도는 7개국만 가능했지만 박은하 동문이 영국 외교부를 수차례 쫓아다니며 설득한 끝에 이뤄낸 것이다. 


“그런 게 공직자로서의 보람인 것 같아요. 공직에서 일한다는 것은 국민, 나라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잖아요. 이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율성을 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통해 나라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좇는 것이 필요하죠. 더불어 미션(Mission)을 가져야 해요. 공적인 분야라는 것은 결국 사명이에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우리나라, 국민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고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사명감이 있어야 해요.”


우리 국민들이 해당 국가와 교역을 하거나 여행을 할 때 어떠한 제재도 당하지 않고 손해 보지 않도록 제도와 지원책을 마련해 주는 것도 외교관의 중요한 역할이라 생각한다. 이 제도를 통해 그는 대한민국 여권의 파워를 높이고 해외에서 국민들의 편의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의 주파수는 공직에 대한 사명감과 자기주도성뿐만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것에도 맞춰져 있다. 


“사람과의 연결성도 제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사실 어떤 일이든지 사람 사이의 일이잖아요. 내가 진정성을 가지고 관계를 맺으면 할 수 있는 일의 폭과 시야도 넓어지고 결국 성공할 수 있어요. 물론, 그냥 주어지지는 않죠.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중요한 자산은 두 개라고 생각해요. 하나는 자신의 마음, 다른 하나는 자기의 시간.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쓰느냐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돼요. 시간을 쓴다는 것은 내가 가치 있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이지요. 이 두 가지를 써야 깊이 있는 인간관계가 구축돼요.” 


자율성과 자기 미션에 대한 사명감, 그리고 사람과의 연결성(Network)이 그가 가진 정체성의 세 가지 축이자, 그를 성공한 외교관으로, 수많은 최초의 기록을 만든 외교관으로 만들었다. 사실 꼭 외교관의 일이 아니더라도 어떤 일이든 이 세 가지만 충족한다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영국 여왕의 마음을 움직인 퀸즈 애플

박은하 동문은 여러 국가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진정성을 나누며 전 세계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다. 그간 외교관으로서의 삶을 돌아보면 많은 만남을 통해 통찰을 얻는 순간도 많았다. 아직도 가슴속에 남은 뜻깊은 추억과 에피소드가 많은데, 특히 영국 여왕과의 만남은 즐겁고 특별한 기억이다.


“영국 대사로 처음 부임했을 때, 버킹엄 궁전에 가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에게 신임장을 제출했어요. 여왕은 보통 해당 국가에 대한 정보를 브리핑 받고 공식적인 언급을 하시는데, 형식적인 이야기를 건너뛰고 오래전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의 개인적인 추억에 관해 많이 말씀하셨어요. 특히 한국 방문 때 여왕님의 70세 생일잔치를 안동 하회마을에서 준비했는데,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김대중 대통령 내외의 초청으로 1999년 4월 19일부터 22일까지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한 바 있다. 영국 왕실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일정을 계획했고 여왕은 안동 하회마을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 관람, 고택 방문, 고추장과 김치 담그기 등 다양한 한국 전통문화를 체험했다. 이때 안동을 방문한 기념으로 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세월이 흘러 나무가 크게 자랐다. 2019년 여왕의 차남인 앤드루 왕자가 여왕 방문 20주년을 기념해 여왕이 식수한 나무 옆에 사과나무를 심기도 했다. 


“안동에서 여왕님 생일에 사과를 보내고 싶다고 대사관으로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제가 사과 박스에 그냥 넣지 말고 하나하나 포장해서 여왕님 얼굴을 담고 ‘퀸즈 애플’이라 붙이자고 제안을 했죠. 50박스 정도를 받아서 왕실 일가에 전달했는데, 나중에 가든 파티에서 다시 뵌 여왕님께서 저를 불러서 퀸즈 애플을 너무 맛있게 드셨다고 하셨어요. 옆에 있던 각국의 대사들이 몰려들어 도대체 무슨 사과냐며 다들 궁금해했죠. 그래서 추가로 주요 국가 대사들에게도 사과를 돌렸는데 대사들이 그러더라고요.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뉜다. 퀸즈 애플을 받은 사람과 아닌 사람.’ 그렇게 제가 영국 대사로 있는 동안 3년 내내 퀸즈 애플을 왕실에 공수해 드렸죠.”


이 경험을 통해 박은하 동문은 외교의 본질에 대해 다시 깨닫게 됐다. 공공외교의 역할을 대하는 영국 왕실의 진정성에 감동했고, 왕실의 권위와 품격을 그대로 외교로 이용하는 영국 외교 전략에도 감탄했다. 무엇보다 국가와 국가 간의 외교 또한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하는 일이기에 관계성의 중요함을 절감했다. 두 차례 중국에 나가 있으면서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관계’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기에 그 역시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봉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기, 박 동문은 대사관에서 엄청난 분량의 김치를 담갔다. 김치를 하나하나 정성껏 포장해 영국 사회의 주요 인사들에게 한국의 맛을 선물했다. 김치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수도 있고, 음식이기 때문에 보내기 전 일일이 전화로 수령 의사를 확인했는데 단 한 사람도 거절하는 이가 없었다. 코로나로 무료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활기를 주는 즐거운 이벤트였다고 모두들 고마워했다. 박 동문은 관저에 초청하는 외국 인사들에게 한국 음식만 대접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오랜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문화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목도했다. K팝이 인기를 끌자 처음에는 한국의 아이돌 양성 시스템을 비난했던 영국 언론들이 BTS의 빌보드 석권을 보면서 ‘21세기의 비틀즈’라고 신문 1면을 찬사로 장식한 적도 있었다. 문화야말로 한 나라의 국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잣대인데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K팝뿐만 아니라 현대미술과 음악, 음식으로 범위가 넓어지고 있고, 한국어 강좌 수요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커지고 궁극적으로는 한국의 소프트파워가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 방향을 향해 가는 국내 1호 외교관 부부의 삶 

박은하 동문에게 있는 최초라는 타이틀 중 하나는 국내 최초의 외교관 부부다. 외교부에서 남편 김원수 전 유엔 군축고위대표와 만나 결혼했다. 부부 외교관으로서 개인적인 삶은 어땠을까. 각자 배치된 국가가 다를 때, 게다가 수년간 떨어져 지내야 하니 어려움도 많았을 듯싶다. 실제로 결혼 후 30여 년 동안 서로 떨어져 있던 시간이 절반을 넘는다. 하지만 박은하 동문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부부 외교관을 배려해서 같은 지역에 발령을 낸다거나 하는 정책은 없어요. 우리 부부는 해외 생활 중 삼분의 일은 같이 보낸 것 같고 나머지 시간은 다른 곳에서 보냈어요. 외롭지 않았냐고요? (웃음) 아니에요. 결혼을 했다고 해서 항상 일상생활을 같이 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에요. 따로 떨어져 있더라도 같은 방향을 보고 가는 것이 더 행복한 부부의 조건이 아닐까요.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신뢰가 있었고, 우리는 서로의 꿈을 응원하는 동지였죠.”


요즘 외교부는 여성 비율이 60% 가량으로 남성 비율보다 높다. 박은하 동문이 처음 외교부에 들어섰던 시절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변화이지만 여전히 그들을 향한 우려의 시선이 존재한다.


“제가 후배 결혼식에서 주례를 한 적이 있어요. 후배는 외교관, 후배의 남편은 국제기구 직원이었죠. 저희처럼 오래 떨어져 살아야 할 경우가 있잖아요. 그래서 세 가지의 조언을 해줬어요. 서로의 그림자를 밟지 말고 서로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 것, 둘 사이 바람이 통할 수 있는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 그리고 서로에게 집착하지 않는 것이에요. 결국 서로가 가고자 하는 목표와 방향이 같아야 하고 그 과정을 즐기면 된다고요.”


사회에서 아직 유리천장이 존재하고 많은 여성들에게 일과 가정의 양립이 어렵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박은하 동문은 결국 더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라고 말한다. 일보다 가정이 더 가치 있을 수도 있고 일에서의 성공이 더 가치 있을 수도 있다. 그 선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충족시키는 일을 찾기란 어려워요. 결국 일이냐 가정이냐의 사이에서 견뎌내지를 못하게 되고 멈춰 있게 마련이죠. 자신이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잘 알아야겠죠. 그런 기준이 없다면 결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과 가정에서 요구하는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돼요.” 

 

자신이 성공한 외교관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겸양의 말을 전하는 박은하 동문.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선진국으로의 성장기에 외교관으로서 많은 기회를 얻었고, 어떤 일이든 여성이라는 이유로 한계를 두지 않았던 부모님의 교육 철학, 그리고 명민한 친구들 속에서 보다 국제적인 꿈을 꾸고 시야를 넓힐 수 있었던 연세에서의 환경과 경험이 그랬다. 그러나 그 운이 모든 것을 담고 있지는 않다. 목표에 대한 열정으로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모든 과정에서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랜 외교관 생활을 마무리하고 좋아했던 그림을 그리고, 국제 행사의 민간 대사 역할을 하며 은퇴 후의 삶 한 조각도 허투루 보내고 있지 않은 그의 오늘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번 여름 그는 올림픽 행사에 초대되어 파리에 머물며 자신의 역할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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