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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이만섭 전 국회의장(정치외교학과 50학번)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15-12-30

신념의 아이콘 이만섭 국회의장이 남긴 유산

“정치와 사랑은 계산하는 것 아냐”

 

이만섭 전 국회의장(정치외교학과 50학번)

 

 

이만섭 전 국회의장(정치외교학과 50학번)이 지난 12월 14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14대 국회와 16회 국회 등 두 차례나 의장을 지낸 이 전 의장은 이른 바 ‘쓴소리 의회주의자’라 불리는 정치 원로다. 2004년 16대 국회의원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한 이래 어느덧 11년이 지났지만 그의 소신 있는 발언들은 이 시대 강직한 정치인의 표본으로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올바른 정치인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 높은 오늘날이기에 그의 부고는 더욱 슬픈 소식으로 다가온다.

 

털보 응원단장에서 정론직필의 언론인이 되기까지

 

1932년 일제 강점기 시대에 대구에서 태어난 이 동문은 1950년 연희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시절에는 응원단장을 하기도 했는데 당시 얼굴에 수염을 길러 ‘털보 응원단장’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단다.

 

 

 

 

1957년 대학 졸업 후에는 동화통신 기자로 언론인으로 생활했으며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주일 특파원, 주미 특파원 등을 지냈다.

 

그는 동아일보 재직 중 필화사건으로 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만큼 정론직필을 실천하는 언론인이었다. 80년대 민주화의 격란 속에서 故 김주열 열사의 사건을 보도한 기자 역시 이 동문이었다. 그는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다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강가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김 열사의 충격적인 사건을 파헤치고 시대의 비극을 사회에 알리면서 민주화의 불씨를 지핀 주역이 됐다.

 

 

뚝심의 정치인, 원칙과 강골의 의회주의자

 

1963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31살의 나이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된 그는 8선 의원과 두 차례 국회의장을 지내는 등 전무후무한 족적을 남겼다. 정치인으로서 누구보다 화려한 이력을 가졌지만 특유의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여러 정치적 굴곡을 겪기도 했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3선 개헌에 찬성할 수 있습니다.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부정부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즉각 퇴진해야 합니다.”

 

1969년 3선 개헌 반대투쟁에 앞장섰다가 8년간 정치 활동의 공백기를 갖게 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의장 시절에는 ‘날치기’를 용납하지 않는 소신으로 스스로 당적을 이탈해 입법부의 수장으로서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기도 했다. 보수와 진보를 초월해 오직 올바른 국가 운영을 위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그는 그의 호 ‘청강(淸江)’처럼 우리나라 의회 정치의 큰 산이요, 푸른 강이었다.

 

정계 은퇴 후에도 사랑과 정치는 계산해서는 안 된다며 오직 국민만을 바라볼 것을 주문하던 그는 후배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뚝심 있으며 꼿꼿한 말로 반듯하셨던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끊임없는 모교사랑

이만섭홀 헌정하기도

 

1994년 명예정치학박사 학위와 함께 ‘자랑스러운 연세인상’을 수상한 이 동문과 우리 대학의 인연은 각별하다. 재학 시절에는 털보 응원단장으로 『연희대학 명물 연전』 제1호에까지 오른 학생이었다. 정계에 입문한 뒤에도 학교발전기금과 연고전 지원금 등을 수차례 전달하며 모교사랑을 실천했으며 ‘정치 지도자의 리더십 특강’ 등 강연을 통해 후배들을 일깨우는 따뜻한 선배가 되어주었다.

 

지금도 그의 흔적은 신촌캠퍼스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2009년 사회과학대학은 연희관에 그의 이름을 딴 ‘이만섭홀’을 만들었다. 연희관 401호 강의실을 국회 회의실 분위기가 나도록 리모델링했으며 이 동문의 모습을 새긴 부조를 설치하고 그의 공적을 담은 현판 등을 설치했다. 이만섭홀 헌정식 당시 이 동문은 “학교를 졸업한 후 60년 만에 이런 홀을 헌정 받게 되어 일생일대의 영광”이라며 “여·야 국회의원들이 계파와 정당보다 나라와 국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생산·민주적인 국회를 만들어야 이 기념홀의 가치가 더 올라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당부했다.

 

2012년 3월 그가 자신의 학생증과 성적기록부 등을 학교 박물관에 기증하면서 6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소중한 추억의 자료들을 만나볼 수도 있게 됐다.

 

 

국민의 응원단장을 떠나보내며

 

그의 영결식은 18일 오전 10시 국회에서 국회장으로 거행됐다. 400여 석이 마련됐지만 추모객이 몰리면서 일부는 서서 영결식을 지켜봐야 했다. 유족과 친지, 장의위원회 위원, 정의화 국회의장, 여야 지도부 및 황교안 국무총리, 정갑영 총장 등 각계 대표 인사가 참석해 이 동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다.

 

정의화 의장은 이날 “대화와 타협의 정치, 변칙 없는 정치로 끝까지 ‘의회주의’를 지켜내신 의장님의 삶 그 자체가 의장님이 남긴 유지”라며 “이제 우리는 의장님의 높은 뜻을 받들어 의회민주주의를 지키고 그토록 염원하시던 상생과 화합, 그리고 통일의 길로 가겠다.”고 말했다.

 

정갑영 총장은 “허스키하면서도 카랑카랑하며, 에두름 없이 곧이곧대로 쏟아지는 말씀은 듣는 이들의 가슴 속에서 더욱 크게 울렸다.”며 “한국 의회민주주의를 위한 의장님의 헌신은 천고불후(千古不朽·영원히 썩지 않거나 없어지지 않음)의 공적”이라고 이 동문을 추모했다.

 

1년 전 ‘정윤회 문건 유출 파문’ 직후 이 동문은 KBS와의 대담에 출연해 답답한 시국에 대해 쓴소리를 뱉어내면서도 국민들에게 희망을 당부했다. 그가 떠난 지금, 늘 우리와 함께 하며 응원을 아끼지 않던 ‘응원단장’의 마지막 쓴소리가 문득 그리워진다. 

 

“이런 상황이라도 우리가 얼마든지 역경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내가 대학 때 응원단장을 했는데 지금은 대한민국 국민의 응원단장이야. (중간 생략) 국민 여러분, 용기를 가집시다.”

 

vol.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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