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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특별 기고] 호레이스 G. 언더우드와 연세대학교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9-07-01

글 : 서정민(본교 신학과 교수) ‘연세’와 언더우드 ‘연세’는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과대학이 1957년 전격적 통합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 이름이다. 세브란스의과대학은 1885년 호레이스 N. 알렌에 의해 설립되었던 광혜원과 그 의학교가 발전한 대학이며, 연희대학은 1915년 호레이스 G. 언더우드에 의해 설립된 ‘조선기독교대학’이 발전한 대학이다. 언더우드는 제중원(광혜원) 설립 직후부터 운영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으며, 이후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이 두 대학은 역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언더우드는 제중원의학교와 세브란스의학교의 발전을 보며 더욱 구체적으로 한국에서의 기독교 종합대학의 이상을 품을 수 있었다. 따라서 두 갈래의 설립연원을 지닌 양 대학은 같은 뿌리와 정신으로 설립되었고, 동일한 전승과 협력으로 운영된 과정을 통해 상호 공통의 전통과 역사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는 오늘날 ‘연세’의 정신 속에 그대로 통전되고 있다. ‘조선기독교대학’, 즉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은 호레이스 G. 언더우드의 오랜 꿈이 실현됨과 동시에 그의 모든 선교 에너지가 투여되고, 땅에 떨어져 죽은 하나의 밀알과 그 결실과도 같은 성과였다. 즉 언더우드는 자신의 대학설립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져 아름다운 신촌캠퍼스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장면을 하늘나라에서 보게 된 것이다. 언더우드 별세 이후 그의 원대한 계획과 뜻에 따라 대학의 설립과정을 주도했던 이는 다름 아닌 ‘세브란스’의 에비슨이었다. 에비슨은 제중원이 폐쇄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극복하고자 언더우드가 직접 찾아낸 인물이다. 당시 에비슨은 캐나다 토론토의과대학의 교수였지만 안식년으로 잠시 토론토에 왔던 언더우드와의 만남을 계기로 한국 선교사로 오게 되었다. 에비슨은 언더우드와 함께 제중원과 제중원의학교를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교로 발전시킨 경험이 있었다. 바로 그 에비슨이 ‘연희’ 설립 후 18년 동안 세브란스의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교장 직을 겸직하며 연세의 기초를 다져 나갔다. 이렇듯 언더우드와 에비슨의 관계는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과대학을 근원에서 결합하고 있는 역사적 연대성을 형성하고 있다. 대학의 위치는 ‘서울’ 언더우드는 처음부터 교육선교를 목적으로 한국에 왔으며, 그때 이미 한국에 대학을 설립할 뜻이 있었다. 언더우드가 언제 처음으로 서울에 대학을 세우려는 뜻을 정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1887년 4월 8일자로 미국의 웰즈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울 도성 중앙에 큰 학교를 세우는 것이 바로 이곳 장로교 선교사들의 소망입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서울에 기독교 종합대학을 설립하려는 계획이 상당히 일찍 세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때 언더우드에게는 “지금까지는 의료가 중요했으나 이제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시세판단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언더우드 개인적인 상황은 한국에서의 선교전망을 그리 밝게 가지지 못할 형편이 있었다. 같은 교파의 알렌과 헤론 사이에서 심각한 의견갈등을 경험하고 자신의 선교사직의 사임을 건의하였으며, 최악의 경우라면 한국장로교 선교부 자체를 철폐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던 형편이었다. 장로교에 비해 감리교가 저 멀리 앞서 나가는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자신이 세운 고아원에 대한 온갖 허튼 소문에 괴로워하고 있던 터였다. 언더우드의 대학 설립의 꿈은 이처럼 절망과 어둠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 그러한 좌절 속에서도 희미하지만 한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고 거둘 수 없는 꿈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언더우드는 과감히 국왕 고종에게 친서를 보내 대학설립의 허가를 요청하였다. 1888년 9월 8일부터 모두 5차례에 걸쳐 청원하였지만 결국 불허를 통지받고 말았다. 일차 시도는 이렇게 좌절되었다. 한편 언더우드에게는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 시스템 전반을 최초로 구축해야 하는 막대한 첫 복음선교사로서의 임무가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대학의 설립에 전력하기에는 또한 여러 가지로 난관이 존재하였다. 그 사이에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대규모로 성장하였고, 평양에 ‘장로회신학교’와 ‘숭실대학’이 설립되었다. 점차 한국에서는 평양이 기독교의 중심지로 부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전국에 걸쳐 오랫동안 순회 선교활동을 하면서 다른 차원에서는 물론 기독교의 차원에서도 한국의 중심은 서울임을 분명하게 느꼈다. 한국에서의 기독교적 이상과 목표를 지닌 종합대학은 반드시 서울에 설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지방에서의 기독교적 발전을 위해서도 그 누구보다 앞장서 헌신한 이가 언더우드였다. 그러나 언더우드가 서울에서 대학 설립을 추진하자마자 곧 바로 평양으로부터 강력한 반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를 두고 내한 선교사들 사이에 심각한 분열과 갈등이 조장될 조짐이 나타났다. 이에 언더우드는 더욱 강력하게 한국에서의 서울 중심성을 역설하며 기독교 대학의 설립을 추진하는 힘겨운 길을 걸어야 했다. 결국 언더우드는 원래의 계획을 수정하여 미국북장로회 선교부 주도의 직영 대학이 아닌 더욱 폭넓은 방식으로 여러 교파가 참여하는 교파연합의 기독교대학을 세우고자 하였다. 또한 대학 설립에 필요한 첫 재정적 지원은 친형인 존 T. 언더우드에게 의뢰하였다. ‘기독교’와 ‘한국’, ‘연세’의 이상적 실존 기독교대학을 세우고자 했던 언더우드에게는 두 가지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 첫째는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 전통을 지닌 한국민족이 근대화 과정의 시행착오로 인해 일제의 침략 하에 들게 된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에게 근대적 고등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가장 절실하고 유효한 투자라는 이상이었다. 둘째는 한국인들의 문화 전통 위에 기독교적 가치관을 덧입혀 세계적이면서도 또한 한국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대학 교육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생각이었다. 이는 ‘기독교’와 ‘한국’이라는 두 축이 언더우드의 대학설립 목표의 양대 기둥이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기독교는 다른 어떤 선교지역에서보다 훨씬 더 강력한 민족적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민족의 수난기에 전래되었다는 특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러한 민족의 고난에 동참했던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노력 때문이기도 했다. 언더우드는 한국의 기독교가 한국의 문화와 전통과 그 혼에 결합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를 대학설립의 목표로 설정했다. 이는 민족의 암흑기에 찬란하게 꽃 피어난 ‘연세’의 국학전통으로 결실을 맺어 연세대학교의 가장 큰 자랑 중 하나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한국이 국권을 상실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고등교육의 부재에서 찾고 있었다. 처음부터 언더우드의 활동을 예의주시, 감시하여 그의 대학 설립 의도와 목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일제 당국은 “모든 종교계 학교는 공식적으로 정규 과목을 통해 종교교육을 실시할 수 없다”는 1915년의 개정 사립학교령을 통해 언더우드의 계획을 방해하였다. 언더우드는 자신이 설립할 대학에서 기독교 교양교육을 실시하지 못하게 되면, 그가 목표로 하는 기독교대학의 교육적 이상을 실현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여기서 일어났다. 당시 총독부 내무국장이었던 우사미 가쓰오가 이러한 상황 하에서 기독교대학 설립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언더우드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설립할 새 대학의 학부 중 하나로 ‘신과’를 설치하고 그 ‘신과’의 커리큐럼과 개설과목으로 전 학부 학생들을 위한 강좌를 개설하면 자연스럽게 기독교 교양교육과 채플을 실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연희전문학교는 기독교적 교육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은, 말 그대로 기독교 종합대학으로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런 역사적 섭리를 통해 ‘연세’의 ‘이상적 실존’과도 같은 ‘기독교’와 ‘한국’이라는 양대 핵심가치의 바탕이 결합되었으며, 이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연세’의 전통이 되었다. ‘언더우드’와 ‘연세대학교’ 원래 언더우드가 꿈꾼 기독교 종합대학의 규모는 지금의 ‘연세’ 캠퍼스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 동으로는 지금의 이화여대를 경계로 하지만, 서로는 수색을 지나 화전에 이르며, 남으로는 마포와 서강, 난지도와 상암, 행주를 연결하는 한강변에 이른다. 구체적으로는 화전 일대에 학생들의 기숙사를 짓고, 여기서부터 학생들을 경의선으로 통학하게 하고, 한강변 난지도에는 학생들을 위한 여름 휴양소를 설치하고, 가좌와 수색에는 교수와 교직원들을 위한 사택시설을 마련하는 구상이었다. 이를 다 현실적으로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언더우드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를 지닌 대학도시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물리적 규모 이상으로 그의 교육이념은 더욱 폭이 넓었다. 그 스펙트럼은 ‘기독교대학이 된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상업적, 농업적, 산업적,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삶 전체를 관장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폭넓은 교육을 통해 한국사회 전체를 위한 지도자를 양성하는 기관을 세우고자 했던 언더우드의 포부는 지금도 ‘연세’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 언더우드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의 나이는 25세였고, 신장이 172cm에 검은 머리칼과 짙은 눈썹, 콧수염과 연결된 구레나룻을 한 강인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한국을 떠날 때는 몹시 쇠약한 모습이었다. 잠시 쉬고 오려고 했었을 뿐 결코 생을 마감할 나이는 아니었다. 그만큼 ‘연세’ 태동의 산고가 컸기 때문일 터이다. 연세대학교는 언더우드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세운 대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더우드가 아니고서는 지금의 연세대학교를 전혀 생각할 수 없다. 그만큼 언더우드와 연세대학교는 직결되어 있다. 언더우드 탄생 150주년을 맞아 다시 한 번 언더우드의 원대한 꿈과 정신을 기리고자 한다. 한국을 향한 다함없는 사랑과 헌신을 몸소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 한국과 ‘연세’에 봉사하였고, 그에 힘입어 온 겨레와 전 세계를 무대로 기독교적 섬김의 정신으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연세인’을 배출하였으며, 지금도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우리 연세대학교의 터전을 일군 언더우드와 그 일가는 ‘연세 정신’의 처음이며 끝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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